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74) 노루가 제 오금을 믿는다

* 노리 : 노루의 제주방언. 노루 장(獐)
* 오곰 : 오금(무릎이 구부러지는 다리의 뒤쪽 부분. 뒷무릎) ‘오금아 날 살려라’, ‘오금을 못 펴다’

야생인 노루의 장기 중의 하나는 달리기다. 참 빠르다. 뒷다리가 길어 가파른 산을 오르며 내달릴 때는 가히 추종불허다. 바람돌이 같은 사냥개도 들판에서 달리기로는 당하지 못한다. 그만큼 노루는 빠른 다리의 오금을 십분 이용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따돌리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다리를 지나치게 믿는 것이다. 저보다 더 날랜 자가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과신한 나머지 턱없이 자만에 빠지고 만다. 과신과 자만은 낭패를 부른다. ‘오금을 믿는’ 노루는 그걸 모른다.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면서 뽐내는 마음이 자만심이다. 자만은 자기 스스로 높은 체하고 거만함을 품는다. 달리 아만심(我慢心)이라고도 한다. 결국 자신을 지나치게 믿어 과신(過信)을 부르다 마침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대종사가 일렀다.

“사람도 그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진급기(進級期)에 있는 사람과 강급기(降級期)에 있는 사람을 알 수 있나니, 진급기에 있는 사람은 그 심성이 온유하여 여러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대하는 사람마다 잘 화(和)하며. 늘 하심(下心)을 주장하여 남을 높이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특히 진리를 믿고 수행에 매진하며, 남 잘되는 것을 좋아하며, 무슨 방면으로든지 약한 이를 북돋아 준다. 한데 강급기에 있는 사람은 반대로 심성이 사나워 여러 사람에게 이(利)를 주지 못하고 대하는 사람마다 잘 충돌하며, 자만심이 강하여 남 멸시하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싫어하며, 특히 인과(因果)의 진리를 믿지 않고 수행이 없으며, 남 잘되는 것을 못 보아서 무슨 방면으로든지 자기보다 나은 이를 깎아 내리려 한다.” 
- (『대종경』 ‘인과품’)
자만심이 공부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 것이다.

“아이고 그것사 누게 못해여. 다 때가 오민 이녁대로 허주기.”
(아이고 그거야 누가 못할까. 다 때가 오면 나대로 하지.)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입만 살아서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건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다. 자만하는 것이다.

자신감과 자만심을 다르다. 자신감은 자신을 믿고 잘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자부심도 강하고 자아존중도 강해 매사에 열정적이다. 자만심 또한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믿는 점에선 같으나, 한계가 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난 잘 될 거야’ 라는, 실천하지 않은 채로 그것은 미래에 대해 뜬구름을 잡는 격이 된다. 실천을 다한다 해도 치밀하지 않다. 미래에 잘될 일만 생각하고 환상에 젖은 나머지 잘못될 일을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잘못된 일이 벌어질 때 대책 마련을 하지 않았기로 결과가 불 보듯 뻔하다. 그 점을 어른들이 경계한다.

자만심을 없애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눈앞의 성공에 도취해선 안된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학생이 한번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고 그에 만족해 버리면 안된다. 좋은 성적은 일회성에 그칠 수 있다. 더욱 꾸준히 노력하고 보다 더 성실히 학습에 임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초지일관해야만 한다. 잘잘못보다 과정에서 충실히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잘했다고 자만해 버리면 일과성 소성(小成)의 역(域)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만은 한순간에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탈을 쓰게 되고 만다. 눈앞의 다른 사람을 무시하기에 이른다. 여기, 인과율(因果律)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기병필패(騎兵必敗)’를 부른다. 교만한 군인은 반드시 패한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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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리가 지 오곰에 믿나. 6.13 전국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유례없는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결과에 취해 자만하는 순간, 유권자의 선택은 냉정하게 달라질 것이다. 사진은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모임. [편집자] 출처=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자만에 넘치는 것을 자신감이 충만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이다. 진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내가 가졌던 생각은 자만심에 불과하구나’라고 느낀다.

‘노리가 지 오곰에 믿나’ 한 것이 바로 그 함정이다. 내가 빠른데 누가 감히 나를 쫓겠는가 하고 자만하다 된코 다치기 십상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며 또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랴. 매사에 자신감으로 당당히 나서되 제발 자만하진 말지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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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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