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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분단선이여, 종이 위 지평으로 돌아가라!

2018년 07월 23일(월) 08:53
고명철 교수 mcritic@daum.net
[BOOK世通, 제주 읽기] (100) 김시종, 지평선, 곽형덕 역, 소명출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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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종, 《지평선》, 곽형덕 역, 소명출판, 2018. 출처=알라딘 홈페이지.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金時鐘, 1929~)의 첫 시집 《지평선》(1955)이 마침내 60여년 만에 일본문학 연구자 곽형덕의 노력의 결실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물론, 《지평선》을 포함하여 김시종의 다른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로 구성된 시선집 《경계의 시》가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이후 장시집 《니이가타》와 시집 《광주시편》이 2014년에 동시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어 재일조선인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김시종 시인의 존재는 그리 낯설지 않다. 무엇보다 김시종 시인은 재일조선인으로서 그의 전 생애의 주름마다 좁게는 제주도, 넓게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그리고 이것 모두를 포괄하는 동아시아와 지구적 시계(視界)의 차원에서 투쟁의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끄럽게 고백하는바, 일제 식민주의 지배체제 아래 황국신민의 삶은 해방을 맞이하여 그로 하여금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4.3항쟁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한 이후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어를 통해 문학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곤혹스러운 삶을 성찰한다. 

이번에 출간된 김시종의 《지평선》은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몫을 맡고 있다. 그것은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이한 조선, 특히 해방공간의 혼돈 속에 민주주의적 상상력이 활발히 솟구쳤던 제주 4.3항쟁에 참여했던 김시종은 화마(火魔)의 섬을 벗어나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밀항하였고, 그 일본에서 한국전쟁을 지켜본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김시종은 일본 열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이 기간 동안 김시종의 시적 삶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다시 말해 《지평선》은 김시종을 재일조선인으로서, 그리고 재일조선인 시인으로서 어떠한 원형질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을까.

울고 있을 눈이
모래를 흘리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비명을 내질렀는데,

지구는 공기를 빼앗겨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노란 태양 아래
나는 미라가 됐다
― <악몽> 부분
김시종의 전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두려움의 실재는 곧잘 ‘악몽’으로 나타난다. 해방공간의 제주에서 솟구쳤던 민주주의적 상상력이 또 다른 제국의 폭압 속에서 대참상으로 이어지고, 정작 시인은 항쟁의 대열에서 벗어나 생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일본 열도로 밀항한다. 게다가 시인은 한국전쟁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결국 엄청난 전쟁 피해 속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냉엄한 현실을 목도한다. 물론, 그렇다고 시인이 한국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일본에 군사기지를 두고 조국으로 보내지는 군수물자 보급을 지연시키든지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김시종 나름대로 후방에서 그만의 또 다른 적과의 투쟁을 가열차게 벌였다.

모국의 분노는 격정의 불꽃을 피어올리고 있다
나를 잊지 않을 당신을 믿고서
나는 당신의 숨결과 어우러지며
맹세를 새롭게 눈물을 새롭게
내 혈맥을 당신만의 가슴에 바치리라
― <품> 부분
하지만, 4.3현장으로부터의 도일(渡日), 재일조선인으로서 또 다른 피식민자로서 삶, 조국분단 등 김시종이 감내해야만 하는 실존적 및 역사적 삶은 “공기를 빼앗겨/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미라”로 전락한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는데”도 그 어떠한 소리도 낼 수 없는 ‘악몽’의 사위로 구속돼 있다. 화마(火魔)의 섬을 벗어나 생목숨은 부지했으나, 이후 김시종을 기다리고 있던 곳은 민족적 차별, 공간적 차별, 계급적 차별, 문화적 차별 등이 난마처럼 뒤엉켜 있는, 한마디로 재일조선인으로서 ‘재일(在日)의 삶’을 견디고 헤쳐나가야 할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오늘도 체포된 조선인.
암시장 담배를 만드는 조선인.
어제도 압류 당한 조선인.
탁배기를 제조하는 조선인.
오늘도 깎고 있는 조선인.
고철을 줍는 조선인.
지금도 찌부러진 조선인.
개골창을 찾아다니는 조선인.
페지를 줍는 조선인.
리어카가 손상된 조선인
― <재일조선인> 부분
말하자면, 일본 열도에 있는 김시종에게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는 4.3항쟁의 참담한 패배와 포개진 역사의 파국이며 그에 따른 암울함의 정동(情動)이 지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구축에 따른 정치군사적 반사이익을 미국으로부터 부여받으면서 식민주의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채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지배를 감행하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적극 이용하여 골칫거리 재일조선인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혈안이다.

오사카 한구석에서
추방되기 전의 가난한 내가
노래해 본다 고함을 쳐본다
아빠를 죽게 한 건 누구냐?
엄마를 살해한 건 누구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전쟁이다
이 전쟁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보내겠다니
가난한 사람을 실업자를
평화를 외친 눈 뜬 사람을
40년 동안 써먹어서 낡아빠진 우리를
― <유민애가(流民哀歌)> 부분
이처럼 김시종은 일본 열도에서 새로운 삶의 구성체, 즉 재일조선인으로서 맞닥뜨리는 구체적 현실을 한국전쟁과 연동시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시종을 민족주의적 시선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지평선》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의식으로, 김시종은 미국이 남태평양 비키니 환초 부근에서 실시한 핵실험으로 피폭된 일본 어부의 죽음을 냉철히 응시한다. <남쪽 섬>, <지식>, <묘비> 등에서 보인 김시종의 반핵(反核) 저항의 시편들은 민족주의적 시선을 넘어 범인류적 차원의 생명 옹호를 향한 간절한 반핵 평화의 연대의식을 선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쉽게 사그라들지 않은 다음과 같은 서늘한 시구가 눈에 자꾸만 밟힌다. 

비키니 섬은 너무나 동양에 가깝고
너무나 미국과 멀다
― <남쪽 섬> 부분
우리는 또렷이 기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두 개의 원자폭탄이 앞당겼고, 이후 서구의 제국은 앞다퉈 과학기술의 낙관적 발전이란 미명 아래 핵기술에 박차를 가하는 과정 속에서 김시종이 묘파하듯 서구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 그래서 자연스레 동양과 가까운 곳에서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그 가공할 만한 핵 피폭의 위험에 동양은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셈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면, 동양에 대한 서구 제국의, 말하자면 식민주의적 과학주의를 시인이 예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김시종의 첫 시집에서 이러한 시적 문제의식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험난한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김시종의 존재론적 그리고 정치윤리론의 정향면(正向面)에 자기를 굳건히 정립시키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
틀림없는 지평이다.
― <자서(自序)> 부분
그렇다. 김시종의 팽팽한 시적 긴장과 명철한 시적 인식 그리고 웅숭깊은 세계인식은 그가 허공에 부유(浮遊)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의 삶의 방식으로 ‘지평’에 서 있기에 가능하다. 온갖 역사의 풍파에 온몸이 휘둘리면서도 그는 ‘재일(在日)의 삶’의 지평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래서일까. 《지평선》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의 마지막 연이 일본 열도를 넘어 전 세계에 타전하는 시적 전언의 반향이 무엇을 간절히 염원하는 지 온몸이 서늘함과 동시에 뜨겁다. 

아버지와 자식을 갈라놓고
엄마와 나를 가른
나와 나를 가른
‘38선’이여,
당신을 그저 종이 위의 선으로 되돌려주려 한다.
― <당신은 이제 나를 지시할 수 없다> 부분
하여, 우리는 감히 명령한다. 세상의 모든 분단선이여, 제발 종이 위 지평으로 돌아가라!

▲ 고명철 교수. ⓒ제주의소리
▷ 고명철 교수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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