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0) 밥이 일한다

“밥은 하늘이다. 밥에서 한국인은 이상향을 찾는다.” 

김지하 시인이 한 말이다. 밥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밥이 곧 하늘인데….
  
일미칠근(一米七斤), 쌀 한 톨에 일곱 근의 땀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 소중한 쌀을 허투루 대해선 안된다는 경구다. 쌀 ‘米’ 자를 파자하면 ‘八十八’이 된다. 쌀 한 알 얻는 데 88번 손이 간다는 의미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소리에 자란다는 말이 떠오른다.
  
산문(山門)에 들렀다 공양 간에서 발우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밥과 국을 담은 나무 식기(발우) 둘을 깨끗이 비우고 난 뒤, 물로 헹궈 마시고는 물기를 행주로 말끔히 닦는 것으로 끝나는 공양의식이다. 밥 티 하나 남기지 않는데다 식재료가 순전히 나물들이라 그릇에 찌꺼기 하나 눌어붙을 게 없었다. 수행자는 밥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요즘을 쌀밥을 먹는다. 못 살던 시절엔 보리밥 조밥도 없어 못 먹으며 제삿날에나 맛보던 흰밥을 ‘곤밥’이라 했다. 풍요의 시대에 와서 역전됐다. 서속밥이 쌀밥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보리쌀이나 좁쌀이 귀한 시대가 된 것이다.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인기다.

우리에게 ‘밥’은 삶 속에서 애환을 같이해 온 말이다. 항아리에 밥할 쏠이 바닥이 나면 감저(고구마) 쪄 곯은 배를 달랬다. 그것도 겨울해는 짧다 해서 두세 개가 고작이었다. 피밥을 먹고 메밀과 밀의 겨로 범벅을 만들고 떡을 해 먹으며 적빈(赤貧, 절대빈곤)의 그 시절을 났다. 고구마, 피, 메밀, 밀 등은 등에 붙은 배를 꾸물거리게 해 준 구황식물(救荒植物)로 구원의 작물들임을 우리는 기억한다. 쌀밥보다는 잡곡밥을 선호한 지 오래다.

삶이 구차해서였을까. 제주엔 유난히 ‘밥’에 관한 속담이 많다.

‘밥이 일헌다.’

밥을 의인화해서, 밥이 삶의 활력소임을 실감나게 빗댔다.

일은 밥 힘으로 하는 것이다. 배가 곯아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기름이 바닥나면 달리던 자동차가 서 버리는 이치와 같다. 배가 고프면 당장 허리가 등에 붙고 온몸에서 기운이 쫙 빠져 맥을 쓰지 못하게 된다. 비바람 속에서 거친 땅을 파던 우리 선인들임에랴. 곯은 배를 달래지 않고는 고된 농사일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배가 든든해야 한다. 그러니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실제 밥이 하는 거나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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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없이는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밥이 일헌다’ 한 것이다. 사진은 톳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밥이 일헌다’ 백 마디의 말이 무슨 소용인가. 가슴에 사무치고 뼛속에 절었던 게 밥임을 한 단문으로 함축했다. 명언이 따로 없다.

‘밥 먹은 사름은 심 좋곡, 죽 먹은 사름은 심 엇나’(밥 먹은 사람은 힘 좋고 죽 먹은 사람은 힘 없다)했다. 당연한 얘기다. 

아잇적에 크면서 들은 말이 있다. “죽은 먹엉 오줌 혼번 싸 불민 그만인다.”(죽은 먹어 오줌 한 번 싸 버리면 그만이다)

죽은 그만큼 근기가 없다. 역시 밥이라야 한다. 옛 분들은 밥을 든든히 먹을 수 있으면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한데 죽만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은 건강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체력에서도 비교가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은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힘이 없으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법게 된다. 밥의 효력은 몇 번을 곱씹어도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밥이 인섬이여”다. 평소 밥만 잘 먹으면 건강에 큰 탈이 없다고 한다. 달리 몸보신할 필요가 없다. 밥이 보약이기 때문이다. 밥은 건강을 담보하는 가장 확실하고 보편적인 섭생(攝生)인 까닭이다. 밥을 몸에 기를 돋워 주는 보약인 인삼이라 할 정도다. 식욕이 왕성해서 식사만 잘하면 보신을 위한 인삼이나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밥 먹은 사름 심광 체 먹은 사름 심은 하늘과 땅인다”(밥 먹은 사람 힘과 겨 먹은 사람 힘은 하늘과 땅이다)라고도 했다. ‘겨’란 곡식 알갱이 껍질을 말한다. 겨를 먹고 사는 사람의 경우는 죽을 먹고 사는 사람에 비해서도 사정이 더 뒤진다. 그만큼 사람은 밥이 건강한 체력을 위한 보신용으로서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밥 먹음도 일 찰림인다.”(밥 먹음도 일 차림이다)

밥이 일하는 에너지원이니만큼 일상생활 속에 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밥을 먹는 것은 평상시 하루 세 끼 정해진 일이지만, 그 식사를 마련하는 쪽이 이미 정해진 일과의 한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먹는 사람은 먹어야 다음 일을 손 댈 수 있고, 식사를 차려놓는 사람은 제 때에 먹어 버려야 뒤처리를 하고 다음 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어느 한쪽이 늦어지면 그만큼 다음 일 착수가 늦어질 뿐만 아니라 일처리도 더뎌지므로, 밥 먹는 일 자체가 곧 일을 차리는 것이 된다 함이다.

언제 밥 한번 먹자 한다. 친교지간에 주고받는 말이다. 이때의 ‘밥’은 식사의 여러 가지, 탕류와 면류, 회류를 모두 묶은 것이다. 밥은 지금도 단연 식생활의 주역의 자리에 있다. 겉을 꾸미는 옷은 날개에 불과하다. 밥 없이는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밥이 일헌다’ 한 것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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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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