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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분배와 인정

2018년 08월 27일(월) 09:38
이유선 교수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105) 낸시 프레이저 외,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문현아·박건·이현재 역, 그린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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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시 프레이저 외,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문현아·박건·이현재 역, 그린비, 2017. 출처=알라딘.

1. 인정: 좌파의 새로운 과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서 많은 지식인들이 나름의 의견은 가지고 있겠지만,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슈가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표명하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건 간에 결코 좋은 말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바로 페미니즘 이슈이다. 특히 대학을 다닐 무렵 기껏해야 1세대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내용을 학습한 70~80세대들의 젠더 감수성은 요즘의 젊은 세대의 눈에는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어서 섣부르게 의견을 표명하느니 그저 가만히 있는 편이 욕을 덜 먹을 수 있다. 페미니즘 이슈에 찬성을 표했다가는 남성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 것이고, 반대한다고 했다가는 여성들로부터 ‘한남충’이라는 욕을 먹어야 한다. 

‘문화연구’라는 학문이 요즘처럼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기인 1980년대만 하더라도 남성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그 당시 페미니즘은 성평등주의 정도로 이해되었고, 부당하게 억압당해 온 여성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데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급진화되어 온 페미니즘은 남성이라는 존재의 태생적 한계가 여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남성인 어떤 사람이 마치 여성을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더라도 그것은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가 변혁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인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가능한 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정의와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지식인의 올바른 태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좌파의 실천적인 어젠다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좌파가 현실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시기에 실천의 문제는 주로 재분배에 집중되어 있었다.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사회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밖의 사회적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하면 해소될 것으로 간주했다. 인종, 동성애,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불평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68혁명이후,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이후에 등장한 ‘문화적 좌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더라도 여전히 남게 되는 무시와 차별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인정구조이다. 

하버마스의 후계자로 프랑크푸르트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악셀 호네트는 인정문제를 좌파의 새로운 어젠다로 제시했다. 사회적인 인정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의 낸시 프레이저 같은 여성철학자가 적극 동조하면서, 사회주의적이며 해체주의적인 변혁을 통해 경제적 재분배와 성차별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좌파의 실천적인 어젠다의 무게 중심은 ‘인정’이라는 문화적인 차원의 문제로 슬그머니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제 좌파 지식인들은 경제적인 불평등의 해소와 더불어 인정구조를 바꿔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2. ‘인정’은 좌파 정치에 유용한 개념인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는 재분배와 인정의 문제에 대한 낸시 프레이저의 견해에 대해 논박한 주디스 버틀러, 리처드 로티, 아이리스 매리언 영 등의 글에 대해 다시 낸시 프레이저가 대답하는 식으로 구성된 논문집이다. 다양한 논점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리처드 로티와의 논쟁만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프레이저는 재분배냐 인정이냐 하는 식으로 두 문제를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부정의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경제적 부정의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롤스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으므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부정의로서 곧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다. 이 부정의는 사회의 재현, 해석, 의사소통 패턴에 뿌리내리고 있다. 경제 부정의가 정치-경제 구조를 재구조화함으로써 개선될 수 있다면, 문화 부정의는 “모든 사람의 자아감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의 재현, 해석, 의사소통 패턴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33쪽)을 통해서 개선될 수 있다. 경제 부정의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급 자체를 그리고 젠더 자체를 폐기하고자 한다. 문화 부정의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은 젠더 특수성의 가치를 ‘인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인종과 젠더는 사회경제적으로 잘못된 분배와 문화적 무시 모두에 시달리는 이가적(bivalent) 집단이다. 인종과 젠더는 폐기되어야 할 개념인가 아니면 인정되어야 할 가치인가?

젠더 문제에 대한 프레이저의 대안은 “동성-이성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모든 고정된 정체성의 틀을 탈안정화하는 것”(이하 같은 책 51쪽)이다. 재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프레이저는 계급분화를 파괴하는 변혁적 개선책을 제시한다. 그는 “재분배-인정 딜레마를 해결할 최적의 방책을 제공하는 시나리오는 경제적 사회주의와 문화적 해체주의를 조합하는 것”(65쪽)이라고 주장한다.

낸시 프레이저가 고정된 정체성의 틀을 탈안정화한다고 말할 때 의도한 것은 문화적 다원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로티는 제2세대 페미니즘이후 등장한 ‘문화 차이의 인정’이라는 문제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이 과연 좌파정치에 유용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고전적인 좌파는 낙인찍힌 집단의 문화에 인정을 부여할 필요보다는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필요에 대해 말했다. 즉 우리 모두가 공통의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고, 그런 생각이 우리를 연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프레이저가 말하는 ‘인정’이 왜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인정이기보다 ‘문화 차이’의 인정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의 진단은 좌파 강단 지식인들의 학술적인 성취가 대중에게 전파된 결과라는 것이다. 강단 지식인들이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여성의 역사를 쓰고, 흑인의 예술적 성취를 칭송하는 것 등인데 그것이 곧 ‘문화적 인정’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좌파 지식인들이 살아남는 동안 “부자들은 지속적으로 계급 투쟁에서 승리”(116쪽)해 왔다는 것이 로티의 냉소적인 평가이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말라는 것(편견을 갖지 말라는 것)과 독특한 특징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차이의 인정)이 구 좌파와 신 좌파간의 차이라면 왜 더 실행하기 어려운 후자의 요구로 이동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그는 말한다. 인종과 젠더 문제에 있어서 단지 공통의 고통과 즐거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아이들을 키우면 될 일을 위계적 이분법을 “다양하고 과도기적인 차이들의 다층적 교차 네트워크”라는 현학적인 용어를 학습하게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해체주의’는 너무 화려하고 세련된 좌파의 무기라는 것이 로티의 평가이다.

이에 대한 프레이저의 답변은 로티가 구좌파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며, “문제는 편견을 제거한다고 모든 무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편견 제거가 재분배의 해결책과 함께 제시된다고 해도 마찬가지”(136쪽)라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참여 동등을 확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가 되는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규범을 차이를 수용하는 대안으로 교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소방관을 뽑을 때, 남성 평균 신장을 토대로 제작된 사다리의 등판 속도를 기준으로 할 경우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변혁적’인 행위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논자들은 매우 신랄한 비판을 주고받지만 상대를 혐오스럽게 보기보다는 대화상대자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얻게 되는 교훈이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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