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제주의소리>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섬의 산물] (68) 유수암리 태암천 산물

절산 아래에 생수가 용출하여 춘하추동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르는 언덕에서 연유된 유수암리.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서 흐리물이라는 유수암, 거문덕이라는 금덕(흑암), 개척단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유수암(流水岩)리는 물이 좋아서 물(水)자를 붙인 것처럼 마을 곳곳에는 유수암천을 비롯해 극락물, 고조물, 고다리물, 어린더러물, 흐리물 등 크고 작은 샘들이 있었다. 그래서 유수암리를 용이 날고 말이 뛰는 용비마약(龍飛馬躍)의 형세로 기암과 산봉오리를 이루고, 곳곳에 생수가 솟아나며, 기기괴괴한 돌과 바위는 생기형국을 형성하는 지세라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유수암리는 삼별초군이 제주도를 본거로 항쟁 당시, 항파두성에 웅거할 때 함께 따라 온 어느 한 고승이 지금의 유수암 절동산 아래 맑은 산물인 유수암천을 발견하고, 그 언덕 아래 태암감당(태암사)란 조그만 암자를 지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 사용은 고려시대의 절이 창건되면서부터라고 하며 스님들은 이 물을 활용하기 위하여 돌로 구시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놓았고 나무를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항파두리가 함락될 때 김통정 장군의 처가 몇 사람의 수하를 데리고 유수암천이 흐르는 이곳으로 피신하여 양지 바른 곳에 종신당이라는 토실을 짓고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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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동산과 유수암천.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유수암천은 한라산 물이 절동산의 수맥으로 내려와 마을 가운데 멈춰 서서 궤(동굴) 큰 바위 안에서 맑은 생명을 용출한다.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성 밖 지역의 식수로 사용했던 산물로 마을의 젖줄이어서 태암천(泰岩泉)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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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암천.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유수암천은 제주에서 중산간이라고 부르는 200고지 이상 산간마을 중 시간당 10t 이상 많은 양이 용출되는 몇 안 되는 산물이다. 물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아, 원천(源泉)은 더럽혀지지 않도록 ‘몸’자 형태로 두 칸으로 나누어 식수와 저수조를 만들었다. 수로를 통해 20m 쯤 떨어진 곳에 다시 ‘몸’자 형태의 세 칸으로 나눈 빨래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물의 양이 많고 그에 따라서 물통이 크기가 모두 다르게 하여 오염을 최대한 막고 과학적으로 사용한 것은 주민들의 삶의 지혜로 귀하게 물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은 물은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연못을 만들어 우마용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물을 받아서 마소들을 먹이기 위해 길이가 4미터가 되는 돌구시가 놓여있는데, 우마용 돌구시는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산물 유적이다. 이 물은 마을의 경제적 원천인 논밭을 만들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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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반(궤)으로 덮은 식수통.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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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암천 빨래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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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하는 광경.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마을에서는 항상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설촌 이래 단 한 번도 호열자(콜레라)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중병을 앓다가 죽은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물통을 확장했으며, 1960년대 초반 공동수도를 가설할 때에 이웃 장전과 소길 양리에서 이 물을 끌어가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제주4.3 당시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산물이 흐르지 않았다가 난이 평정되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재건하자 다시 솟아났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어승생 용수개발로 중산간 지역에 상수도가 공급되면서 이 산물을 마을의 유물로 남게 되었다. 이 산물은 유수암 팔경중 제8경인 ‘한밤에 마을에 퍼지는 산물소리로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는 야반찬성(夜半泉聲)으로 마을에서는 유수암천 쉼터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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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마용 돌구시.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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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암천 쉼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유수암리에는 ‘흘이물(흐리물)’이란 산물도 있었다. 이 산물은 물이 어느 한 곳으로 용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서 계속 스며나는 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유수암 상동이었던 ‘검은덕이’의 식수였다. 산물은 식수용 물통과 두 곳의 빨래터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그러나 1994년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매몰되어 잃어버린 물이 되었으며 빨래터 일부만 남아 있다. 

마을에서는 흘이물이 매몰된 도로 가에 유적비를 세워 산물의 존재를 후대에까지 기억하도록 하고 있는데, 곁에 있는 치수기념비에는 흘이물이 한자명인 희류수(喜流水) 소화15년(1940년)이라고 쓰여 있다. 도로 동측 하천변 녹고뫼 1코스란 팻말 뒤에는 흘이물로 내려가는 옛 계단과 빨래터는 잡풀들로 뒤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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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이물 유적비.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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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이물 빨래터.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이외에도 유수암리에는 궷물오름(묘수악) 복동쪽 사면에 궷물이란 산물이 솟아나고 있다. 이 산물은 ‘궤’라는 바위굴에서 솟아나고 있는데, 이 일대 유수암리에 속하지만 목장은 장전리 공동목장조합이 소유하고 있다. 오름 입구 안내판에는 일제강점기 때 장전공동목장조합에서 목축을 위해 만든 암소용 급수장이라 소개하고 있다. 산물은 돌무더기 밑 토층에서 흘러내려 물웅덩이인 두 개의 우마용 물통을 채우고 있다. 이 산물은 여러 차례 개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개수한 모습이 어색하다. 

궷물오름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5소장으로 백중날 무사방목을 기원하는 백중고사를 지내는 제단이 산물입구 언덕에 있다. 제주에서 백중제(百中祭)는 7월 14일에 우마번성(牛馬繁盛)을 기원하며 지내는 목축의례로 테우리코 혹은 쉐멩질(소(牛) 명절)이라 하여 마소를 방목하는 목동들의 명절이다. 마소를 돌보는 사람을 ‘테우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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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궷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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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중고사 제단.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유수암천은 애향심의 발로로 거금을 쾌척하여 치수했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는 유수암천의 어제와 오늘을 집약시켜 글을 새겨 놓아 ‘극심한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며 여름에는 빙수와 같이 차고 겨울에는 따스한 이 물은 온 마을에 역질(疫疾)을 예방하였고 성인병을 볼 수 없으니 가히 예천(醴泉)’이라고 적혔다. 또, ‘마을주민들은 이 샘을 영천(靈泉)이라 생각하여 정성을 다해 보존해 왔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장구한 세월동안 마을의 삶을 지켜주며 희노애락을 공유해 왔던 유수암천과 젖줄과 같은 흘이물을 기억한다는 것은 척박한 자연 환경 속에서 쉼 없이 이어져 온 과거의 삶과 현재 우리의 삶을 후대의 삶으로 이어 주는 것이다.

# 고병련(高柄鍊)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자원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사단법인 동려 이사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고연(노인요양시설 연화원) 이사장을 맡고있다. 또한 환경부 중앙환경보전위원과 행정자치부 재해분석조사위원, 제주도 도시계획심의, 통합영향평가심의, 교통영향평가심의, 건축심의, 지하수심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건설기술심의와 사전재해심의 위원이다.

제주 섬의 생명수인 물을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인 ‘제주생명의물지키기운동본부’ 결성과 함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용천수 보호를 위한 연구와 조사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을 통해 지킴이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섬의 생명수, 제주산물> 등의 저서와  <해수침입으로 인한 해안지하수의 염분화 특성> 등 100여편의 학술연구물(논문, 학술발표, 보고서)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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