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최신 기기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맛, 멋.
백만 년 만에 한 번이라 말해도 충분할 만큼 아주 오랜만에 한라산 생태숲길을 걸은 게 지난 추석 연휴였다. 그리고 다시 주말을 맞았는데 자꾸 그 길이 생각났다. 능력은 부족한데 일복은 차고 넘쳐 지난 몇 년간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지난 일요일 역시 할 일은 많았지만 일단 다 덮고 자연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자연의 초대에 혼자 가기 아쉬워 친구 두 명을 불렀다.
“이렇게 좋은 날씨 다시 만나기 힘들어. 좀 걷자.”
친구 둘이 흔쾌히 응해줘서 (내가 이렇게 협박해서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야,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 참지 말고.') 우린 한라산 생태숲길을 걷기로 했다. 각자 집안 식구들 밥 해먹이고 만나 숲 길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를 넘겨 오후로 막 넘어가는 즈음이었다.
숲 길 산책의 시작은 나의 생색이었다.
“이것 봐봐, 너무 예쁘지. 너희들 나에게 감사해. 나 아니었으면 이런 것도 못 볼 뻔 했네.”
평소 나의 생색에 익숙한 친구들은 나 혼자 열심히 말할 동안 아무 반응이 없다가 딱 이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췄다.
“야...이렇게 좋은 날은 좀 걸어줘야 해. 그게 가을 햇살에 대한 예의라고.”
“아, 그거 좋다. 햇살에 대한 예의. 그거 글로 써.”
“그래, 그거 좋아?”
우린 다 같이 멈춰서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색 하늘이 거기 있었다.
우린 걷다가 땅을 보았다. 길 한 가운데서 사마귀 한 마리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우린 걷다가 왼쪽 오른쪽에서 바람결에 춤추는 억새도 보았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은 정확하게 기분 좋을 만큼 선선했고 공기는 아주 쾌적했다. 등 뒤로 내려앉는 햇살은 너무 따뜻해 정말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최신 공기청정기, 온도 조절 기기가 맞춤형으로 가동되어도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맛, 멋이었다. 한 발 한 발 걸으며 만나는 나무, 물, 꽃 등은 절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자연에 대한 찬가가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우린 아주 실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려가서 뭘 먹지.
여러 가지 안이 제시되었으나 막상 시내에 도착하니 일요일 오후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었다. 특히 우리가 원하는 튀긴 닭을 파는 곳은 오십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아다닌 결과 녹두전에 우리 곡주, 서양 곡주 한 잔씩을 곁들일 수 있었다.
햇살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건강하게 걸었으니 건강을 해치는 행위도 살짝 해줘야 균형이 맞는다면서. 깔깔거리며 종횡무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끝없는 수다가 가을의 절정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덧붙임: 햇살이 사라진 초저녁 가을 길도 참 좋다. 해가 기울면서 어둠이 희미하게 다가올 때 이십년이 넘은 추리닝 점퍼에 편한 바지, 한 쪽은 흰색 세 가지 선이 사라져 짝짝이처럼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젊은이들 마냥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한가롭게 걸어보았다. 모양이야 볼 품 없지만 마음은 자유로웠다.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한 줄 정리. 걷고 또 걷자,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 길을.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https://blog.naver.com/jejubaramsu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