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최신 기기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맛, 멋.

백만 년 만에 한 번이라 말해도 충분할 만큼 아주 오랜만에 한라산 생태숲길을 걸은 게 지난 추석 연휴였다. 그리고 다시 주말을 맞았는데 자꾸 그 길이 생각났다. 능력은 부족한데 일복은 차고 넘쳐 지난 몇 년간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다.

지난 일요일 역시 할 일은 많았지만 일단 다 덮고 자연의 부름에 응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자연의 초대에 혼자 가기 아쉬워 친구 두 명을 불렀다. 

“이렇게 좋은 날씨 다시 만나기 힘들어. 좀 걷자.”

친구 둘이 흔쾌히 응해줘서 (내가 이렇게 협박해서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야,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 참지 말고.') 우린 한라산 생태숲길을 걷기로 했다. 각자 집안 식구들 밥 해먹이고 만나 숲 길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를 넘겨 오후로 막 넘어가는 즈음이었다. 

숲 길 산책의 시작은 나의 생색이었다. 

“이것 봐봐, 너무 예쁘지. 너희들 나에게 감사해. 나 아니었으면 이런 것도 못 볼 뻔 했네.”

평소 나의 생색에 익숙한 친구들은 나 혼자 열심히 말할 동안 아무 반응이 없다가 딱 이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췄다.

“야...이렇게 좋은 날은 좀 걸어줘야 해. 그게 가을 햇살에 대한 예의라고.”

“아, 그거 좋다. 햇살에 대한 예의. 그거 글로 써.”

“그래, 그거 좋아?”

우린 다 같이 멈춰서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색 하늘이 거기 있었다.

우린 걷다가 땅을 보았다. 길 한 가운데서 사마귀 한 마리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우린 걷다가 왼쪽 오른쪽에서 바람결에 춤추는 억새도 보았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20181006_230644842_iOS.jpg
▲ 태풍 콩레이가 물러난 다음 날 광양로터리 건물들 위로 보인 하늘색 하늘을 찍어보았다. 잠깐이지만 한가하게 커피숍에 앉아 진한 커피 한 잔 마시며 하늘을 보니 어느 순간 내 마음에 하늘이 들어왔다. 숲길이든 동네길이든 큰 도로이든 공평하게 요즘 하늘은 하늘색 하늘이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은 정확하게 기분 좋을 만큼 선선했고 공기는 아주 쾌적했다. 등 뒤로 내려앉는 햇살은 너무 따뜻해 정말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최신 공기청정기, 온도 조절 기기가 맞춤형으로 가동되어도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자연의 맛, 멋이었다. 한 발 한 발 걸으며 만나는 나무, 물, 꽃 등은 절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자연에 대한 찬가가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우린 아주 실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려가서 뭘 먹지.

여러 가지 안이 제시되었으나 막상 시내에 도착하니 일요일 오후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었다. 특히 우리가 원하는 튀긴 닭을 파는 곳은 오십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돌아다닌 결과 녹두전에 우리 곡주, 서양 곡주 한 잔씩을 곁들일 수 있었다.

210343_244825_3726.png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햇살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건강하게 걸었으니 건강을 해치는 행위도 살짝 해줘야 균형이 맞는다면서. 깔깔거리며 종횡무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끝없는 수다가 가을의 절정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덧붙임: 햇살이 사라진 초저녁 가을 길도 참 좋다. 해가 기울면서 어둠이 희미하게 다가올 때 이십년이 넘은 추리닝 점퍼에 편한 바지, 한 쪽은 흰색 세 가지 선이 사라져 짝짝이처럼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젊은이들 마냥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한가롭게 걸어보았다. 모양이야 볼 품 없지만 마음은 자유로웠다. 유쾌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한 줄 정리. 걷고 또 걷자,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 길을.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https://blog.naver.com/jejubaramsum )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