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99) 삼 섞은 할머니는 노래 부르고, 노 섞은 할아버지는 운다

* 서끈 : 섞은, 흩어 놓은
* 놀래 불르곡 : (흥얼흥얼) 노래 부르고
* 노 : 새끼

삼은 베(布)의 재료로, 삼나무 껍질을 벗겨 놓으면 헝클어져 끝(실마리)을 못 찾을 지경이 된다. 어지러워 정신이 왁왁(캄캄)하다. 노는 새끼줄이니 삼 껍질이 헝클어진 것하고 비교가 안된다. 

한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헝클어진 삼을 만지는 할머니는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차근차근 풀어 나가는데, 그보다 훨씬 쉬운 노끈을 앞에 받아 앉은 영감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는 얘기다. 한쪽은 노래하고 다른 한쪽은 울상이다. 희비의 대비가 흥미롭게 눈길을 끈다. 

노동은 즐거운 것, 일은 즐겁게 해야 하는 법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필시 남녀의 특성에 연유할 것이다.

여성은 모름지기 남성과는 달리, 차분한데다 일함에 치밀 정교하고 시종 끈기가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비교 우위에 있음을 말할 때 쓰는 금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의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에서도 작품 제목처럼 남성과 차별화된 여성의 우월함이 부각돼 있다.

현실을 좇아 끝까지 뛰어 들어갔던 어려운 시기들을 겪은 후에야 무한히 편안하고 진실한 사랑이 무엇이었던가를 깨닫게 되지만, 아름다운 세상은 이미 벽 너머로 가 버렸지 않은가. 

자기에게 맞는 색깔을 찾기 위해 수많은 우월한 여성들과의 만남에 탐닉하지만, 결국은 여성의 주도면밀한 파워에 조종당한 약한 남성의 모습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먼 데서 찾을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성은 상냥하고 온화함, 감정이입에 예민하고 감각적인 것으로 각인돼 있기도 하다. 그런 관념은 이를테면 남자가 하는 것과 여자가 하는 것의 ‘틀(유형)’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인식된 데서 나왔을 법도하다 

남과 여가 공유하는 문화가 다르지 않느냐고 본다면 성차별이겠지만, 남과 여 사이에 자행돼 온 성차별은 문화가 돼 버릴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거쳐 관습화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런다고 조곤조곤 말하며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이 여성적인 본능적 요소는 결코 아닐 테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귀부인, 정숙한 여성상, 열녀상 등이 여서의 표본이자 사회의 이상적 여성상으로 인식돼 온 (고정)관념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를 좇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마치 여성들의 특성인 것처럼 돼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여성적이라는 틀에 갇혀 버렸던 것이다.

남성적이란 말도 매한가지.

남성 하면, 주로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역동성을 들춰내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사실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세상에는 세심한 남자, 조용한 남자, 울음이 많은 남자, 레이스나 분홍색을 좋아하는 남자, 우유부단한 남자가 생각보다 많은데도 그런다.

흔히 여성은 섬세하고, 차분하고, 부드럽다는 등으로 비유하고 남성은 털털하다, 덤벙댄다, 섬세하지 못하다 등으로 빗대는 통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고, 또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남과 여의 차별, 함께 고쳐 나가야 할 사회적 문제다. 실제로 그렇게 차별해 보는 눈길은 불편한 게 사실이다. 남녀를 차별적인 시각에서 보지 말고, 성별 때문에 남성적‧여성적이라 구분 짓는 것이 아닌, 사람 개개인의 개별적 특성으로 한 개인을 바라보아 줘야 한다. 그런 편안한 시선이 보다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 아닌가.

‘삼 서끈 할망은 놀래 불르곡, 노 서끈 하르방은 운다.’

어딘가 모르게 옛 제주사회의 남녀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 놓은 것 같다. ‘여다(女多)’의 섬이 아니랄까 봐, 여성의 위상을 한 층위 띄워 놓은 느낌마저 든다. 우리 제주 여성들-우리 할망, 우리 어멍, 우리 누이, 우리 아지망들-참 인내하고 조냥하며 한 세상을 참하게 살았던 어르신들이다. 아덜 똘이 훌륭히 되고 손지 잘 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았던, 눈물 속의 한 맺힌 세월이었다. 그분들 삶은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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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섞은 할머니는 노래 부르고, 노 섞은 할아버지는 운다.
자녀들을 챙기는 제주 여성의 모습. 두 손으로 손수레를 끌고 막내 아이는 등에 업었다. 사진은 1970년대에 찍었다.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서재철.
 
아무래도 하르방들은 할망들에 미치지 못했음을 우리는 오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분명 알고 있다. 헝클어진 게 삼 껍질이 아닌 노끈인데도 받아 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있지 않은가. 

속담 속의 남과 여의 비유는 극명히 대비된다. 하르방이 할망을 도저히 못 따르고 있다. 부지런에서, 참을성에서 하르방은 불합격 점수다. 제주 여성들에게는 ‘삼 섞어 노래 부르는’ 여인의 DNA가 있다. 제주의 여성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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