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재심, 역사의 기록] (1) [종합] 법원, 재심청구인 18명 전원 공소기각...70년 전 군법재판 부당성 사법부가 첫 인정 

 
“망사리(그물로 된 그릇) 속에 가뒀던 놈이 달아난 것 마냥 시원하다” -김평국(1930년생)
“이상 더 말할 것이 없다. 새로운 삶을 찾았다. 이제 제2의 인생이다” -박동수 (1933년생) 
“지난 70년 정말 힘들었다. 오늘부터 두 발 펴고 편하게 잘 수 있겠다” -양일화(1929년생)
 
공소장이 없는 사상 초유의 제주4.3 재심 사건과 관련해 법원이 생존수형인 18명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소 제기가 모두 무효라고 판단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제갈창 부장판사)는 양근방(87) 할아버지 등 4.3생존수형인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검찰의 공소를 17일 기각했다.
 
법정에는 거동이 힘든 정기성(1922년생), 현창용(1932년생) 할아버지를 제외한 재심청구인 18명 중 16명이 참석했다. 불참한 수형 생존인을 대신해 자녀들이 법정에 출석했다.
 
제갈창 부장판사는 10분에 걸쳐 판결 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재판부의 입장을 밝혔다.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 제주지법 제201호 법정 내부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피고인들 모두 지난 세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 재판부 입장에서 그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문.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 제주4.3재심사건에 대해 사실상 무죄 취지인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오희춘 할머니(1933년생)이 법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할머니는 17살때 물질 하려는 문서에 서명하라는 말을 듣고 시인을 했다가 경찰에 잡혀가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가 4.3재심 사건 재판이 끝난후 4.3생존 수형인 16명에게 공소기각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가 4.3재심 사건 재판이 끝난후 4.3생존 수형인 16명에게 공소기각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자 박동수(왼쪽), 현우룡(가운데) 할아버지가 만세를 외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공소기각은 형사소송법 제327조에 따라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에 위반해 무효일 경우 재판을 끝내는 절차다. 70년 전 공소제기가 잘못됐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무죄로 해석할 수 있다.
 
재판이 끝난 후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와 임재성 변호사는 재판부가 죄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생존 수형인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무죄 취지라는 설명에 생존 수형인들은 그때서야 환하게 웃었다. 법정 밖에서 두 손을 들어올려 만세를 외쳤다. 도민연대는 ‘무죄’를 뜻하는 나리꽃을 어르신들의 가슴에 달아줬다.
 
오계춘(1925년생) 할머니는 “재판 결과를 듣고 눈물이 났다. 죄를 벗는 느낌이었다”며 “이제 큰 짐을 내려놓았다. 70년의 서러움이 오늘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4.3재심사건은 공소장과 판결문이 없는 국내 첫 재판으로 관심을 끌었다. 재심 청구의 근거가 된 70년 전 군법회의 기소장과 공판조서, 판결문 등 입증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군법회의의 유일한 자료는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한 수형인 명부였다.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보관창고에서 찾은 국가 문서다.
 
재심 청구를 위해서는 재심청구서에 원심판결의 등본, 증거자료, 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법적 요건 논란 속에 법원은 2018년 9월3일 전격적으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 4.3재심사건에서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양근방 할아버지(오른쪽)가 법정에 나와 환하게 웃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4.3재심사건에서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임창의 할머니(왼쪽)와 박순석 할머니(오른쪽)가 법정에서 나와 환하게 웃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재판부는 당시 군법회의가 재판권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재심의 절차적 적법성을 떠나 사법기관의 판단이 작용했고 피고인들이 교도소에 구금된 사실도 인정했다.
 
검찰은 70년 만에 본안 소송이 이뤄지자, 공소사실 유지의 법적 근거와 방식 등을 두고 고심을 거듭해 왔다. 변호인측은 입증 책임은 검찰에 있다며 공소기각으로 압박했다.
 
결국 검찰은 재심 청구인들의 진술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존재하지 않는 공소장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12월11일 법원에 공소장 변경 허가신청을 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소장 변경의 충족 요건인 사건의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재판부는 검찰의 노력을 1948~1949년 당시 군법회의의 공소사실을 복원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검찰은 2018년 12월18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공소장 변경 신청이 불허된 이상 공소사실을 특정했다고 볼 수 없다”며 스스로 공소기각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군법회의를 통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고 당시 국방경비법에 근거한 예심조사 등 일련의 절차가 부당하다며 70년 전 공소 자체를 무효로 판단했다. 
 
▲ 제주4.3재심사건에 대해 사실상 무죄 취지인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오희춘 할머니(1933년생)가 법정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 제주4.3재심사건에 대해 사실상 무죄 취지인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제주4.3도민연대가 오계춘 할머니에게 무죄를 뜻하는 나리꽃을 가슴에 달아주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재판부는 “당시 어떤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확인할 자료가 없다”며 “검찰이 복원한 공소사실도 사후에 재구성한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옛 국방경비법에 따라 법무부 장교 중에서 임명된 예심조사관에 의한 공평한 예심조사를 거쳐야 한다”며 “당시 기소사실의 통고 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임재성 변호사는 “유무죄를 떠나 70년 전 군법회의가 총체적 불법이었다는 점이 인정됐다”며 “무죄 판결보다 더 나아가, 당시 재판의 불법성을 사법부가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재심 선고에 따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검토하고 있다”며 “나머지 생존 수형인(12명)에 대해서도 빠른 시일에 재심 청구 여부를 결정 하겠다”고 밝혔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오늘 판결로 4.3의 역사 정의가 실현됐다”며 “이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올해 안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재판 직후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 판결문을 신속히 검토해 항소 포기 여부 등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생존 수형인들은 이날 4.3 관계자들과 만나 회포를 풀고 내일(18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재단을 찾아 참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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