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07)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돌베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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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돌베개, 2015. 출처=알라딘.

3.1운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한 소녀의 뇌리에 새겨졌고,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인생은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3.1운동의 후예였고, 나머지 삶은 3.1운동의 후기였다.  
-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중에서
이 책은 한국현대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앨리스(1903∼1956?)라는 여성 지식인의 비극적 삶과 그가 속한 시대의 안타까움을 조망하고 있다. 현앨리스는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며,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거나 유명 인사도 아니다. 현앨리스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관련된 비극적 죽음으로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앨리스는 임시정부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현순(1879~1968) 목사의 장녀로, 아버지가 하와이로 거주를 옮겼던 1903년에 출생해 우리나라 최초의 하와이 출신 미국시민으로 기록되었다. 1907년에 가족들과 서울로 귀환한 뒤 이화여중을 졸업한 현앨리스는 아버지가 3.1운동의 주역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함에 따라 상해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방 전까지 조선, 중국, 미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이후 해방 전후의 격변기에 박헌영, 여운형 등 사회주의 노선의 인사들과 접촉하며 조국의 이상적 해방을 추구했고, 1949년 체코를 거쳐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못가 박헌영과 남로당 숙청에 이용되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현앨리스의 상하이 거주 시절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1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은 보타이나 넥타이를 매고 양복이나 중국옷으로 성장을 했다. 1921년 겨울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베트남혁명의 아버지 호찌민이 청년의 모습으로, 박헌영, 김단야,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그리고 현엘리스 남매의 모습이 함께 담겨져 있다. 

당시 상하이는 민족운동의 열기와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조직됨으로써 혁명의 도시이자 낭만의 도시이기도 했다. 동생 현피터는 상하이 소년혁명단의 열성 단원이었고, 박헌영은 그 지도자였다. 이 교류는 훗날 현앨리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1921∼1922년 상하이 시절 현순, 박헌영, 최창식은 교집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거나 깊숙이 관여했다. 

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주최로 열렸다. 미국 태평양회의에 실망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극동민족대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급 단체들에서 대표자들을 파견했다. 김규식, 여운형, 홍범도, 김상덕, 조봉암, 김단야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스크바로 갔다. 중국, 일본, 몽골의 운동가들이 같이 한 자리였다. 레닌은 독립자금을 약속했고, 혁명과 내란으로 불안정한 화폐 대신 금괴로 전해졌기에 우여곡절 끝에야 자금 일부가 임정으로 넘겨져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를 열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청년 박헌영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민족주의자 목사의 아들딸들도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정동제일교회와 상동 교회 목사였던 현순, 새문안교회 장로였던 김규식, 기독교 전도사였던 여운형 등이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시대의 대세였고, 멈출 수 없는 조류처럼 보였다. 이 시대조류에서 현앨리스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와 조우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현순 목사는 1923년 2월 24일 하와이로 돌아갔고, 현앨리스도 1930년 6월 하와이에 귀환했다. 일본 유학에서 만난 조선인 남편과 이혼 직후 태어난 아들 웰링턴도 어느덧 세 살이 되었다. 1931년 뉴욕으로 간 현앨리스는 1935년까지 헌터 칼리지에서 학업에 종사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뉴욕 한인들은 일본의 중국침략을 규탄하고 이를 저지하는 일환으로 일본이 미국에서 고철 등의 전쟁물자를 수입하는 데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또한 뉴욕 중국후원회 대회를 열었고 앨리스 남매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앨리스와 동생 현피터는 1930년대 후반부터 앨리스가 체코로 떠난 1949년까지 인생의 행로를 같이 했다. 남매는 1930년대 하와이에서 노동조합, 미국공산당과 관련되었고, 해방 이후 재미한인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나아가 1948년에는 미국공산당 당원으로 기록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현엘리스는 하와이 주둔 미군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945년 10월 23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되었다. 맥아더가 여성군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부 군속으로 13명의 니세이 여성 언어전문가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도쿄에 배치된 현앨리스는 1945년 12월 중순 서울로 전근했다. 주한 미24군단 정보참모부 산하 민간통신검열단(CCIG-K)이 그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민간통신을 검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리고 대일 공격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1944년 38세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했던 동생 현피터도 육군부의 군속이자 한국어 통역관으로 한국에 배치되었다. 

현앨리스의 서울 전근은 꿈에 그리던 ‘해방 조국’으로의 환향이었다. 현앨리스는 남한 체재 중 두 차례 언론에 공개되었고, 해방된 조선에 귀환한 재미교포남매의 이야기는 이슈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 방첩대는 1946년 5월 18일 조선공산당 본부를 급습하고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 이들 문서에서 현앨리스가 조선공산당과 접촉했으며, 박헌영과 만났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주한미군 사령부가 현앨리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사건은 1946년 3월 1일에 발생했다. 현앨리스와 클로스키 일병은 좌익계의 남산공원 3.1절 기념식에 참석하려 했다가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았다. 클론스키는 뉴욕 일대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였다. 클론스키에 대한 감시에서 시작된 조사는 현앨리스로 이어졌다. 수사 결과 남한에서 공산주의 혐의를 받고 현앨리스 남매를 포함한 9명의 주한미군 관련자가 추방되었다.

추방된 현앨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독립》에 합류했다. 또한 재미조선인민주전선(북미조선인민주전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조직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노선을 따라 조직된 미주 ‘통일전선’이었다. 1943년 창간된 주간신문 《독립》은 사실상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기관지였고, 1940년대와 50년대 재민한인 진보진영을 대표했다. 《독립》의 논조는 1946년부터 급격하게 과격한 방향으로 선회했다. 미국 FBI는 관련자들을 본격적으로 사찰하기 시작했다. 1955∼1956년 주요 관련자에 대한 비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가 시작되었고, 이민국은 관련자들을 추방하는 절차를 밟았다. 

《독립》은 쇠락해갔고, 재미한인 좌파의 입지 축소는 명백해졌다. 1949년 3월 현앨리스는 3월 미국을 떠나 체코로 향했다. 체코 체류 9개월 동안 현앨리스는 북한 대표단이 참가하는 두 차례의 공산권 국제회의에 참가했고, 이를 《독립》에 전달하는 통신원 역할을 했다.

현앨리스는 1949년 11월 말에서 12월 초 사이 평양에 들어갔다. 《조선여성》 1950년 4월호에 <미국의 로동녀성들>이라는 글을 썼지만, 이후 현앨리스의 소식은 끊겼다. 1953년 소위 남로당 숙청 재판 때 현앨리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소위 ‘반당·반국가적 간첩 도당들의 사건’으로 남로당 핵심 인사들이 1953년 2월에 체포되었고, 3월 박헌영이 체포되었다. 재판은 민간법정이 아니라 군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공판 기록에 현앨리스는 모두 네 번 언급되었고, 1955년 12월 박헌영 재판 과정에서도 이름이 재차 거론되었다.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며, 현앨리스는 그것을 실행한 미국 간첩망의 우두머리로 몰고 갔던 것이다.  

스스로 운명의 개척자라고 생각했으며 사상의 조국을 찾았다고 북한으로 간 이들은 한결같이 “미제의 스파이”로 몰렸다. 현앨리스는 박헌영 재판과정에서 미국의 스파이로 등장했다. 태평양전쟁 전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를 후원했으며, 나아가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해 스스로 미군에 입대했던 앨리스의 이력은 도리어 미국의 공작원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현앨리스의 존재론적 기반은 미국, 기독교, 민족주의였다. 그녀는 목사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났고,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920년대 초반 사회주의에 공명한 이래, 진보주의자, 혁명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역설적으로 그녀를 진보주의와 사회주의로 이끈 중요한 동력은 3.1운동과 그 여파였다. 3.1운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한 소녀의 뇌리에 새겨졌고, 그녀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3.1운동의 후예였고, 그녀의 나머지 삶은 3.1운동의 후기였다.

상하이의 시대조류와 시대정신은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급선회했다. 민족주의자 목사의 딸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와 마주했고, 3.1운동의 여진 속에 혁명적 전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상하이 시절의 관성이 미주 시절 현앨리스의 삶을 규정했다. 그녀는 상하이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하와이에서의 노동운동, 해방 후 남한 혁명운동의 민족주의적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정확히 말해 그녀가 매료된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적 이상주의 혹은 이상주의자들이 뿜어내던 열정과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중에서
현앨리스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던 행적으로 인해 북한에서는 미국의 스파이, 미국에서는 북한 공산주의자, 일본에서는 공산당 연락책, 남한에서는 이중 간첩자로 낙인찍히며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세계 각국에 흩어진 기록으로 퍼즐을 맞추듯 현앨리스의 생애를 추적한 저자는 “한국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 여성의 치열한 삶을 스파이의 우극으로 마멸시켰지만, 미래 한국은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 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 성찰의 시간이 지금이기를, 그리고 계속되기를 소망해본다. 그래서 북에서 잊어진 우파 독립운동가, 남에서 잊어진 좌파독립운동가 모두 우리의 역사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이제 3.1절 100주년이 되는 그 날에는 그분들 한 분 한 분 모두 호명할 수 있기를!  

▷ 양정심
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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