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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00주년, 카를 마르크스를 돌아보다

2018년 10월 08일(월) 13:00
서영표 교수 news@jejusori.net
[BOOK世通, 제주 읽기] (109)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원제: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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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출처=알라딘.

조금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올해가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는 맞지만 생일인 5월 5일이 한참 지난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약간 어색하다. 생일은 지난 다음에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청년 마르크스>가 2017년에 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 영화의 주인공은 마르크스보다는 그의 친구 엥겔스라고 생각했지만. 칼과 프리드리히가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 방에서 논쟁하면서, 이 글의 주제인 《공산당 선언》을 써내려가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였다. 어쨌든 어색함을 무릅쓰고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보아야겠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남부의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유태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법학을 공부하러 본(Bonn) 대학에 진학했지만 곧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다. 당시 독일 철학을 지배했던 헤겔(Friedrich Hegel)을 받아들였지만 곧바로 그의 철학을 비판한다. 단지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헤겔이라는 거인과 나란히 철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된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자신의 나라에서 추방된 후 벨기에와 프랑스를 전전하지만 거기서 당대의 걸출한 운동가들을 만나 사상의 지평을 넓혔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였던 고대 그리스 철학에 토대를 둔 독일 고전 철학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후에, 거기에 실천적인 노동자 운동의 경험을 더하게 된 것이다. 당시까지 나온 모든 경제학 사상을 섭렵하면서 역작 《자본》을 준비했던 것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1883년 삶을 마감하게 될 영국 런던에서였다. 책이 귀하던 시절 백지에 직접 책을 베끼고 자신의 논평과 주장을 써내려가면서 수천 페이지의 노트를 만드는 독한 공부의 길이었다. 스스로가 1872년 《자본》 1권의 프랑스어판 서문에 적었듯이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으며,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자만이 학문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한 공부의 결과는 그의 생전에 온전히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기 손으로 《자본》의 1권만 출판하고 나머지는 노트로, 그것도 소문난 악필 때문에 친구 엥겔스와 딸 이외에는 읽을 수조차 없는 상태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오늘의 주제인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은 1848년 2월 혁명 직전에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팸플릿이다. 1820년생인 엥겔스가 스물여덟 살, 마르크스가 서른 살 때였다.(둘 다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스물일곱과 스물아홉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제목부터 거리감을 두게 한다. 내용을 떠나 제목만으로도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 텍스트를 들여다보면 유려한 문체로 쓰여 진 서양근대사의 압축본을 만나게 된다. ‘노동자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세계 전체’라고, 전 세계 노동자를 향해 ‘단결하라’고 선동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당시 유럽 역사의 단계를 정확히 짚어 내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래의 구절을 ‘음미’해 보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상전들에 사람을 묶어 놓고 있던 잡다한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끊어 버렸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노골적인 이해관계, ‘현금 계산’ 이외에 아무런 끈도 남겨 놓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신앙적 광신, 기사적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외경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보장된 혹은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업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에 의하여 은폐되어 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선언》에는 많은 번역본이 있기에 특정한 텍스트의 쪽수를 적지는 않겠다. 지금까지 소개되었던 책들과 달리 길지 않은 팸플릿이기에 다양한 판본에서 인용부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짧지만 강렬하게, 문학적지만 학술적으로 이보다 더 정확히 유럽의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구절이 학술적으로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공감되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70년 전에 통찰했던 것이 2018년 우리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묶어 주었던 유대, 제주에서는 ‘수눌음’이라고 불리었던 연대의 정신, 바다와 한라산, 오름과 함께 했던 삶의 방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노골적인 이해관계, ‘현금 계산’”의 관계로 대체되고 있지 않은가? 버려야할 낡은 인습과 함께 삶의 양식이 뿌리 채 뽑혀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던져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국제조약과 협약, 헌법, 법률, 조례에 보장된 “정당하게 얻어진 수많은 자유들”“파렴치한 상업자유”앞에 무력해진 현실을 살고 있다.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기본권은 부정되기 일쑤이며 기업인의 탈법은 기업 활동을 위한다는 이유로 쉽게 ‘용서’된다.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세입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건물주의 (소위 갑질이라고 불리는) 횡포는 사유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된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최저임금조차도 기업 활동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비난받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전근대 시대 종교와 정치적 환상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착취가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2018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때보다 더 정교해진 인권과 복지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보장된 삶의 기준은 ‘상업자유’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편의점 점주가 아르바이트 학생을 착취하면서 그 어떤 핑계를 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공공연하다. 그래서 직접적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에 무미건조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파렴치하다.     

아주 많이 인용되는 또 하나의 구절을 읽어보자.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들, 따라서, 생산관계들에,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이전의 다른 모든 산업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 양식의 변함없는 유지가 그 제1의 존립 조건이었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이 부르주아 시대를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 준다.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신분적인 것, 모든 정체적인 것은 증발되어 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모독당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공산당 선언》 가운데
  
인터넷과 텔레비전을 통해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광고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이다. 애플과 삼성은 경쟁하듯이 스마트폰의 새로운 모델을 출시한다. 새로 만들어진 모델이 “정착되기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 마음속에서 불러일으켜지는 부단한 동요와 항구적 불안과 격동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채 낡기도 전에, 종종 그 기능을 다 알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신기술을 통해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이윤(마르크스가 잉여가치, 특히 특별잉여가치라고 불렀던 것)을 획득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삶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들 전체에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도록” 자본가들을 강제하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경향의 필연적 결과다.
 
“굳고 녹슨 관계들은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온 관계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는” 것이 역사의 진보다. 그러나 지금 사회가 겪고 있는 것처럼 인간으로서의 생존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부정당하고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파괴되는 사회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과거의 낡은 질서를 지탱해온 ‘신성한 것’은 모독당했지만 현대사회는 ‘인권’, ‘정의’, ‘민주주의’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그런데 《선언》이 발표된 지 170년이 지금, 2018년 자본의 논리는 앞선 세대가 피와 땀으로 얻어낸 ‘신성한 것’을 돈의 논리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9세기 중엽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이 파괴했던 “모든 신분적인 것, 모든 정체적인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이 상징했던 사회이동의 가능성은 닫혀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끊임없는 혁명”으로 요약한 것은 기술발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에 의해 뒷받침되는 기술이 우리 시대의 신성한 것인 ‘인권’, ‘정의’,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가들과 똑같이 돈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대학의 연구자들은 기술발전이 초래할 사회적 효과, 그리고 그 효과를 사람들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면 그만이다. “새롭게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정착되기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리는” 기술의 개발 속도는 사람들이 기술을 인간 복지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파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자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진보에 대해서 열광했다. 다만 모든 것을 차가운 현금계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는 후, 살과 뼈와 피를 가진 인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추구되는 기술 발전이 결국 우리에게 파국이 되어 돌아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생활상의 지위와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다음세대 후손들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걱정할 수가 없다. 자본의 논리에 따른 “냉정한 눈”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만 능력 있는, 즉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2018년 시장의 힘과 화폐를 숭상하는 사회에서 자연 생태계를 걱정하는 것은 공문구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긴 시간 지평의 안목과 자연생태계 전체, 그리고 다음 세대의 복지를 걱정할 수 있는 인식 틀이 생겨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와 사회적 유대를 강조하는 각국 정부의 정책도 ‘차가운 현금 계산’의 논리가 초래한 파국을 가리려는 미봉책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 ‘차가운 현금 계산’의 논리가 정부 정책의 기조를 결정하는 한 위기는 깊어지고 파국으로 향한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이다. 
  
20세기 내내 마르크스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참혹한 현실을 초래했던 공산주의 운동이 마르크스를 내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상에 기초했지만 때때로 그를 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초래된 모든 역사적 재난을 이유로 그의 역사적, 철학적 통찰을 모두 기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르크스는 학술적으로 철학사에,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사상사에 족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빛나는 자리에 그가 앉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마르크스는 죽어 있는 교조(dogma)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읽어내고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Gareth Stedman Jones)가 최근에 펴낸 마르크스 전기의 제목처럼(《카를 마르크스-위대함과 환상 사이》) 그의 위대함과 환상 모두 공정하게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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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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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 2018-10-08 17:10:32    
80년대 대학시절 좆도 모르는것들이 빨간책 읽어야 먹물 먹은거추룩 거들먹거리던 시절이 있었지,그걸 지금생각해봐도 꼴통들 선동허는디는 특효약이지^^
1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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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근 2018-10-08 14:07:35    
흔히 "사람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은 머리는 이상을 향하되 발은 현실을 디디고 서라."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20대에 사회주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40대가 되어도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란 말도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인간을 모르고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논리도 인간의 특성을 헤아리지 못 한 것은 오래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차 산업사회에서 가치의 창출은 노동에 의해 이뤄졌지만 산업사회가 되면서 한 대의 기계가 열 사람 백 사람의 몫을 하니, 결국 가치의 창출이 자본에 의지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이디어가 창출하는 가치가 월등히 높아진만큼 노동의 가치는 하락하는 것이다. 이제는 분배에 좀 더 신경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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