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55) 자청비·가믄장아기·설문대 할망 신화의 공통점은?

창조의 여신 설문대, 바람의 여신 영등, 농경의 여신 자청비, 직업의 여신 가믄장아기 등 제주신화에는 여신(女神)이 많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여다(女多)의 섬이어서 그런가, 문명의 조류에서 밀려난 격절된 섬의 문화가 만들어낸 결정체일까.

제주신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은 대체로 강력한 파워를 가진 ‘울트라 슈퍼’ 우먼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제주 여자들은 물질과 밭일을 도맡아 해온 전천후 노동자였으며 임산부도 출산하고 이틀만에 노동에 투입되는 악바리(?) 일꾼이었다. 이 같은 여성들의 강인한 정신의 반영이 슈퍼 우먼을 탄생시킨 배경이라고 보여진다. 조선조의 거상 김만덕은 이러한 신화적 여성상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신화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이지만 신화는 당대인들의 신념, 가치관, 염원을 반영한다. 신화가 우리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주신화에서 여성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이는 모계사회의 잔재일 수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이 그만큼 활발했다는 걸 뜻한다. 아마도 아득히 먼 옛날 제주섬에서는 양성 평등을 넘어 여성 중심, 여성 우위 사회가 장기간 존속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제주 여성신화의 압권은 단연 자청비, 가믄장아기, 설문대 할망 신화이다. 이 신화의 주인공(여성)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지상에서 복락을 누리다가 죽어서 신이 된다. 그런데 이들 신화의 공통점은 에로티시즘의 안개를 피워 올린다는 점이다. 세 신화는 여성의 몸 가운데 가장 은밀하고 민감한 부위(?)를 드러내어 묘사함으로써 남성들의 본능을 자극한다.

우선 가믄장아기 신화의 셋째 딸은 부모가 “너는 누구 덕에 잘 먹고 잘 사느냐”고 묻자, 부모님 덕도 있지만 배꼽 아래 선그뭇(음부) 덕이라고 대답한다. ‘부모 덕이 아닌 여성의 음부 덕에 산다’는 언명은 가히 놀랍다.

국문학자 현승환은 가믄장아기 신화에 바리데기, 온달, 서동, 심청 설화 등의 화소가 들어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 신화가 심청전과 리어왕 전설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신화는 정말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녔다. 

연전에 내가 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란 희곡은 이 신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또한 자청비는 남자로 위장해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데, 문도령은 자청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오줌 멀리 갈기기’ 시합을 제안한다. 이때 자청비는 꾀를 내어, 대 막대기를 잘라다가 바짓가랑이에 넣어 오줌을 누니 열두 발이나 나갔다. (상상만으로도 해학이 깃든 장면이다.)

어느 날, 종놈 정수남이가 자청비를 꼬셔서 굴이굴산에 데려가는데, 종놈은 목이 마른 자청비의 옷을 홀랑 벗기고 엎드려 연못의 물을 마시게 하면서 뒤에서 겁탈하려 한다. 정수남의 수법은 요즘 미투(me too) 운동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남성들보다 더 노골적이고 간교하다.

한편 설문대 할망은 두 발을 성산면 오조리의 식산봉과 성산리 일출봉에 디디고 앉아 오줌을 쌌다. 그 오줌 줄기의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육지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 섬이 됐다. 이 섬이 바로 소섬(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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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문대 할망은 두 발을 성산면 오조리의 식산봉과 성산리 일출봉에 디디고 앉아 오줌을 쌌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신화학자 문무병은 설문대의 음문이 고래굴 같다고 과장하지만 나는 할망의 음문이 보통 여자의 2~3배는 될 거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난 설문대(泄門大: 배설하는 문이 크다)라는 이름에서 그 징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설문대 할망 신화의 주제(메시지)는 빈곤 탈출과 연륙의 꿈이다. 고대의 제주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성취 불가능한 꿈을 설문대라는 슈퍼 우먼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키워드는 대리 체험→대리 만족 →대리 성취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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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신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제주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이었다가 죽어서 신이 된다. 곧 신은 인간의 후신(後身)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신과 인간의 경계가 나누어진 그리스신화와 제주신화가 다른 점이다. 올림프스 산정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무서운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진 그 시점에서 인간적인 드라마와 역사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그러므로 제주신화에는 제주혼, 제주정신의 엑기스가 내재돼 있는 것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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