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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부터 한 자리를 지켜온 서귀포 유일 레코드숍 예음사가 최근 운영자의 안타까운 소식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제주의소리

서귀포 유일 레코드숍 '예음사', 운영자 세상 떠나면서 사실상 폐점...28년 명맥 끊길라 

제주 서귀포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레코드숍 ‘예음사’가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 30년 가까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운영자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면서 사실상 맥이 끊기게 됐다.

서귀포시 일호광장 옛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예음사는 1991년부터 지금 위치에 자리잡은 레코드숍이다. 현재 제주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레코드숍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음사는 오랜 유물처럼 취급되는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 CD 등을 취급해왔다.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이제는 온라인 음원으로 바뀌는 시대 흐름에 따라 오프라인 매장 역시 자취를 서서히 감추는 와중에도, 예음사는 변함없이 남아 ‘음악 애호가’들이 꾸준히 찾는 추억의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새 음반을 들여놓기 보다는 남아있는 옛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고, 비디오테이프를 CD로 변환하는 작업 등을 해왔다. 수익성만을 따졌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수 있겠지만, 음악을 지독히 사랑했던 운영자 고(故) 이근배씨(64)의 고집 덕분에 예음사는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씨는 1980년대 서귀포약국 지하에서 '시사랑'이라는 카페를 운영한 '카페지기'였다. 카페에서 손님들에게 들려줄 음악을 찾기 위해 차린 레코드숍이 바로 예음사다. 시사랑을 10년간 운영하다 레코드숍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니, 음악과 함께 보낸 세월이 40년 가까운 셈이다. 

그러나 최근 이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예음사의 미래를 더 이상 장담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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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음사 내부 모습. 오른쪽은 故 이근배 씨. 제공=‘신대장’의 제주살이 제주여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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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음사 내부 모습. 옛 LP판이 수납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제공=‘신대장’의 제주살이 제주여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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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음사 내부 모습. 전축, 오디오 장비가 눈에 띈다. 제공=‘신대장’의 제주살이 제주여행 블로그.
▲ 굳게 닫힌 예음사. ⓒ제주의소리

활발한 수익 활동보다는 일종의 취미 같은 성격이 강했고, 생전 운영자가 음반·전축 등을 다루는 나름의 기술을 보유했기에 그나마 유지돼 왔다. 임대 점포이기에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예음사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 시민은 “이씨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늘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부지런히 가게를 지켜왔다. 자신만의 CD를 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예음사를 찾아 도움을 받기도 했다”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SNS 상에서도 추모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귀포시민 신승훈 씨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생전 고인은 하루에 5~6개 테이프만 팔려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앞으로 10여년은 계속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며 “커피도 내어주고, 이야기도 나누고, 또 오라고 하셨던 사장님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28년 역사의 문화공간 예음사가 계속 유지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제주 시인 현택훈씨는 "한 사람이 사라지면 한 마을이 사라지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서귀포의 마지막 레코드 가게를 지키던 분의 부고를 접하니 안타깝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유족들은 갑작스러운 이별에 크게 상심하면서, 자신들이 미처 몰랐던 예음사의 존재에 대해 새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씨의 딸 윤지(32) 씨는 녹록지 않은 여건에 큰 벌이가 없어도, 오전 9시 예음사 문을 열고 오후 6시에 닫는 아버지를 보면 답답한 마음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8일 <제주의소리>와 통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술도 담배도 안하고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때로는 조금 답답해보였다. 음반으로 벌이가 괜찮은 적도 있었지만 10여년 전부터 음반 판매는 사실상 없는 셈이었다. 그래서 ‘레코드 가게 말고 돈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아버지가 예음사에 애정을 듬뿍 쏟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생전 가족들에게도 ‘예음사를 평생 운영하겠다’고 말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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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예음사와 당시 이근배 씨 모습. 제공=이윤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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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고인이 된 이근배 씨의 최근 모습. 제공=이윤지. ⓒ제주의소리
조용히 가족 옆을 지켜온 아버지가 남긴 낡고 작은 레코드숍. 윤지 씨는 그 공간이 아버지 본인에게는 물론, 적지 않은 제주도민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한때 가족들은 아버지가 그런 가게에 매달리는 걸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음사를 통해 아버지를 기억해준다니...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다. 아버지가 워낙 조용히 지내셔서 외롭게 사시다 떠났을까 마음이 아팠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음사를 아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남겼다.

윤지 씨는 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예음사를 어떻게 할 지는 아직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아버지 말고 음반에 대해 잘 알거나 관련 기술을 가진 가족이 없다. 제3자가 예음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크다”고 덧붙였다. 아버지 대신 다른 사람이 예음사를 이어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28년간 한 자리를 지키며 음악 애호가들의 소중한 벗이 돼 준 서귀포 예음사. 주인을 기다리는 LP판, 카세트테이프, 전축만이 남아있는 이곳의 역사가 이대로 마침표를 찍을 지, 아니면 계속 명맥을 이어나갈지 관심이 모아진다. 

▲ 옛 서귀포시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예음사.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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