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주년(2018년) 지나 2년 후 한국전쟁 70주년(2020년)을 보냈다. 이념전쟁으로 과열된 두 사건은 제주도 근현대사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제주4·3에 비해 덜 다뤄진 감이 없지 않다. 일부 군 관계조직(국방부, 보훈처, 재향군인회, 해병대 등)의 활동 외에, 6·25 관련 학술적 조명 및 기록화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외면되거나, 4.3속에 녹여내 버림으로써 그 자체로 독립된 조사나 공론화는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2020년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사를 읽고
“인종, 국적, 종교적 신앙이나 정치적 의견에 근거를 둔 불리한 차별 또는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기타의 모든 차별없이 균등하게 대우”(제네바 제3협약 16조, 1949. 8. 12).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은 전쟁포로의 규정과 인권, 대우에서 진일보한 정책을 제안하고 제네바 3협약에 합의했으나 모두 비준은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제네바 3협약의 적용을 받은 첫 사례이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전쟁초기 포로에 대한 국제협약을 준수한다고 선언했으나 전황과 정책이 변화하면서 태도를 돌변했다. 포로 정책의 변화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는 피난민과 포로수용소, 군사훈련장이라는 후방의 역할을 담당했다. 전국 각지로부터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전쟁 20일 만인 7월 16일부터 제주・한림・성산・화순항을 통해 1만여 명이 들어왔다. 1951년 1‧4후퇴 직후 북한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피난민이 제주로 왔다. 피난민 수는 1951년 1월 3일까지 16,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월 15일에는 87,000여 명, 5월 20일에는 무려 148,000여 명에 이르러 제주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UNCACK 제주팀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민이 기억하는 한국전쟁한국전쟁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예비검속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제주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에서 5만여 명 이상의 전쟁 피난민과 전쟁고아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분류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가 제주도에 들어왔다. 제주 4.3사건 당시 산으로 도피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고 군경 토벌작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섬은 한국 해병대와 잔류한 주한미군사고문단 파견대, 제주시와 모슬포수용소를 관리하기 위해 입도한 미군, 육군훈련소에 파견된 미군과 각종 첩보기관의 정보원들까지 육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
“10대 시절 저는 총살 직전에 오직 그 분 때문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 분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제주4.3때 억울하게 잡혀가 총살 직전까지 간 것으로도 모자라 한국전쟁이 터진 뒤 예비검속으로 또다시 죽을뻔 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지만 예비검속 당시 무고한 사람들을 살려준 문형순 서장님을 위해 이야기합니다. 저 같은 늙은이에 관심 갖지 말고, 오직 그분의 공적을 부디 많이 알려주세요.” - 예비검속 생존자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강순주 어르신 인터뷰 中 -한국전쟁
“나는 죽었노라 이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숨지었노라. (중략)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나는 유쾌히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中)한이 서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의 봄이 찾아오나 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마주한 것은 한겨레가 총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포로수용소 건물이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라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해 나무판자로 물방아같이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병들이 줄을 매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미군부대 출입 이발사 서병수 씨 모슬포 중공군포로수용소 목격담 내용. 『대정읍지 1』 中)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친공-반공포로 간 분산수용 정책을 펼쳐 모슬포 지역에 유엔군 포로수용소 캠프-3을 설치하고 약 2만여 명의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포로를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친공포로와 중화
휘몰아치는 한국전쟁의 광풍 속에서 최남단 제주는 포화가 쏟아지는 격전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육군훈련소·포로수용소·육군병원 등 설치, 해병대 3·4기, 육군 장교 배출 등 군사력을 보충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후방 전략기지로서의 필수적인 역할을 도맡았다.뿐만 아니라 전쟁 당시 생겨난 중국인민해방군(이하 중공군) 포로 수용을 위한 수용소도 건설됐다. 장소는 대정읍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한 곳, 그리고 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인 제주시 용담동의 속칭 '다끄네'에 한 곳 등 총 두 곳이다. 이 두 곳을 합쳐 약 2만명에 가까운 중공군이 제주에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는 3년 1개월 간 이어진 한국전쟁을 임시 봉합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 대표가 각각 협정문에 서명한 이후 한반도는 70년 가까이 지구촌 유일의 분단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당시 에도 한국전쟁의 휴전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멈춘 기쁜 소식이지만, 당시 휴전협정 전후의 보도를 보면 마냥 반가워할 수 없는 정치공학적 이해관계도 드러난다.# 드디어 휴전! 하지만 반대 집회?휴전 첫 보도는 체결 다음 날인 7월 28일자에 실린다. ‘휴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중요한 계기다. 이후 UN군과 한국군은 북진을 이어가면서 한때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품기도 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한국전쟁 당시 도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해준 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전시 상황을, 외신 소식을 포함해 매일 주요뉴스로 보도했다. 더불어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의 주도권을 국군과 연합군이 잡고 나서는 다양한 지역 소식도 지면을 통해 알렸다.# 세기적 38선 돌파, 숨통 트이는 제주도1950년 10월 10일자
“저가 나가버리면 어머니와 눈 먼 누나만 남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합니다. 그러나 나라냐, 집이냐는 다시 생각할 것 없겠습니다. 이 약한 몸으로 괴뢰를 하나라도 없앨 수 있다면 이런 기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북한의 침략에 맞서 전쟁터로 향하는 학도병의 절실한 마음이 묻어난다. 가족을 두고 전선으로 떠나야 하는 슬픔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센 다짐이 함께 담겨있다. 이 사연은 1950년 8월 1일 에 소개된 ‘한중생 125명 출전 지원’ 기사에 등장한다.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부터 1953년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에 젊음을 바친 국가유공자 고우석 용사가 지난 9월 29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지난 6월 제주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은 이 땅에 일어나선 안된다"며 항구적 평화를 역설했던 고인이다. 1933년 2월 21일 제주 삼양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고인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9월 전장에 뛰어들어 1955년 2월 15일까지 4년 5개월여간 헌신했다. 1950년 지리산 지구 전투, 강원도 고성 884고지 전투 등 11사단 소속으로 다양한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최전선 강원도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고자 한 몸 바쳐 나라를 지켜낸 제주 호국영웅을 기리는 명예도로가 있다. 우리가 자유롭게 이 땅을 거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분들의 희생 덕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제주의 길 위로 그 분들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다. 제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인 강원도 고성, 철원, 양구, 평안남도 자개리 등 곳곳서 치열한 전투 끝에 산화한 호국영웅 고태문, 강승우, 김문성, 한규택 용사. 이들이 전장으로 나가기 전까지 나고 자랐던 고향에 2015년 고태문·강승우·한규택로가, 2019년엔 김문성로가 지정됐다.혼을 불사르
민족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한국전쟁. 엄청난 사건이었던 만큼 예상하지 못한 영향도 발생하곤 했다. 4.3으로 제주는 예술을 포함, 모든 사회 요소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폐허가 된 문학계에 작은 씨를 뿌린 것은 아이러니하게 한국전쟁으로 제주를 찾은 피난민들이었다.조명철(86) 전 제주문화원장은 1950년대 제주 문학계를 경험하며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 원로 문학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경험하고 이후 제주4.3과 전쟁통을 목도했다. 고교시절 피난민이었던 유몽 김윤국에게 가르침을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는 이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할 수 없으니 즉각 최전선에 나아가 북괴군과 싸우도록 해주십시오.”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서 전장에 뛰어든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제주농업중학교(이하, 제주농중)를 중심으로 제주 읍내 중학생 145명은 자발적으로 ‘학도돌격대’를 조직하고 태극기를 품고 전장으로 나섰다. 1950년 7월 초부터 학도호국대를 통해 군사훈련을 받아온 이들은 8월2일 제주도 학도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나선 제주여성들. 바로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의 여군으로 기록된 해병대 4기 126명이다. 어느덧 허리는 구부러지고 얼굴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됐지만 ‘해병대 4기’라는 자부심과 나라 사랑은 찬란한 보석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해병대 4기 중 여성 용사 126명 가운데 한 명인 강길화(89) 할머니를 만난 날은 7월 28일. 마치 할머니에게 군 입대 소식이 전해진 1950년 8월 24일 여름날처럼 후텁지근했다. “(서귀포) 강정천은 그때도 물이 참 좋았어. 그
36척(10.9m) 높이로 우뚝 솟은 백색의 삼각(三角)탑.제주시 동문로터리 한 가운데 서 있는 해병혼탑(海兵魂塔)은 한국전쟁사의 한 획을 그은 제주도 해병대의 역사를 응집한 상징물이다. 1960년 4월 15일 세워진 해병혼탑에 대해 이해하려면 해병대 병 3·4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북진, 도솔산 전투 등 한국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귀신잡는 해병’, ‘무적 해병’으로 불리며 피 흘려 나라를 지켜냈던 해병 용사들의 혼이 이 탑에 서려 있다. # 대한민국 해병대의 근간 ‘제주도’ 각 기수마다 1
“사실, 선정 소식을 듣고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할머니(박평길 용사 부인 故 신대광 여사)가 살아계셨을 때 할아버지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셨으면 더 좋았을텐데...”올해 1월 국가보훈처가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한 제주출신 박평길 용사의 손자인 박재완(47) 씨는 눈물이 고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전장에서 산화하신 할아버지 박평길 용사. 그리고 끝내 당신의 남편을 가슴 속에 고이 품은 채 평생을 홀로 지내시다 몇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 신대광 여사가 생각나 목이 멘 까닭이다.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2020년 1월의 전쟁영웅에 선
“다방은 문화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오와시쓰’(oasis)이다.”낯선 외래어 표기가 인상적인 1955년 3월 15일 ‘제주신보’ 기사의 한 구절이다. 지금이야 ‘다방’ 두 글자가 적힌 간판은 대도시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옛 흔적이 남아있는 소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흡사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멸종 공룡처럼 느껴진다.다만, 한때 지구를 호령했던 공룡들처럼 다방은 30년 넘게 제주 지역에서 복합 예술 문화 공간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피난민들이 몰려온 한국전쟁을 계기로 제주에서 예술 문화가 다방과 함께 새출발을
“이제까지 만난 분들만 해도 416명입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6.25참전 제주 영웅 발굴을 위해 발 닿는 곳까지 기록할 겁니다.”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 육군 강원도 고성군 884고지 전투, 호남지구 공비토벌 작전 등 다양한 곳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제주 영웅들’을 만나 일일이 기록을 남긴 사람이 있다.정수현(83) 작가다. 정 작가는 2006년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3권의 저서를 집필하며 총 416명의 제주 용사들을 만났다. 올해는 제주도재향군인회와 함께 참전용사를 총정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