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8) 제주 보성시장 김순열 어르신 ②

보성시장이 개장하던 1972년. 중앙닭집의 김순열 어르신(1940년생)이 처음부터 닭집을 한 것은 아니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어물전을 시작하기로 했고 지금의 중앙닭집 바로 맞은편 점포를 얻었다.

“처음에는 너이가 동업해서 생선 장사했어. 9년 정도 했을 거야. 좋은 생선 가지고 와서 팔고 싶어서 새벽마다 부두로 나갔어. 애들 아빠는 성산포에 옥돔 사러 가고 나는 모슬포까지 자리돔 사러 가고. 버스 타고 다녔어. 꼭 내 눈으로 보고 사야 마음이 편해. 바다에서 막 올라온 좋은 생선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엿날에는 그 모슬포 가려면 꼬불꼬불 길로 가서 사와도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어. 왜 성산포랑 모슬포까지 갔냐고? 사람들이 좋은 건 딱 봐도 다 알아. 성산포 옥돔, 모슬포 자리돔 하면 다들 좋아해 줬어. 생각해보니 어물전 할 때 제주 사람들이 한치 제일 많이 좋아해 줬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래도 한치가 많이 났었어. 강원도 오징어는 처음부터 들어왔던 것은 아니고 나중에 나오고. 그거 장만하면 손가락이 다 헤싸지고. 난 장갑을 잘 안 끼고 해서.”

사람들은 어르신이 가지고 오는 생선을 좋아해 주었다. 하지만 네 명이 함께 하는 장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생선을 빨리 팔아버리지 않으면 선도가 자꾸만 떨어져 애를 먹었다. 날씨의 영향을 받아 매일 신선한 생선의 수급도 장담할 수 없었다. 처음 하는 장사는 내 생각처럼 술술 풀리지 않았고 자꾸만 여러 난제에 부딪혔다. 하지만 성실함만은 잃지 않고 늘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이 있었고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보성시장에서 9년을 어물전을 하셨다.

“그렇게 9년 생선 장사를 했어. 그런데 우리 맞은편에 육지 사람이 있었는데 닭 튀기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데 언젠가 다시 육지로 올라간다고 했어. 그러고 보니 닭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거야. 바당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맛도 있고. 그래서 넘기려고 한다고 해서 물어보니까 전세가 250만 원이더라고. 그 전세값 막둥이 아들한테 200만원 빌려서 이거 내가 인수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중앙닭집을 내가 받은 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쭉.”

우연한 기회로 하게 된 닭집이지만 어르신은 이 자리가 본인의 평생 삶이 될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하셨다 했다. 어르신의 말씀을 그대로 빌려서 하자면 그 당시 한국에는 이것저것 수입품들이 들어오는 시기였는데 내가 파는 것들은 그래도 제주산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장사했단다. 조금 싸고 저렴하게 재료를 받아서 장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신선하고 좋은 정육을 써야 음식 맛도 좋을 것이라는 점은 확고하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중앙통닭은 한 번도 수입 고기를 써 본 적이 없다.

젊었을 때부터 남편분이 몸이 약한 편이라 몸이 고된 일을 하지 못했지만 김순열 어르신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작업은 남편 분께서 직접 해 주신단다. 어르신은 특히 기계에 대한 공포가 있어 남편 분께서 같이 재료 밑 준비를 해 주신다. 기계로 갈아야 하는 마늘이나 생강은 아버님의 몫이다. 그리고 이 집의 양념 소스도 아버님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다. 보통 중앙닭집에는 김순열 어르신 혼자 계실 때가 많지만 이른 오전의 시간이나 매장에 빼곡히 걸려있는 시는 모두 아버님의 시간으로 함께 채워지고 있었다. 제주에서 오십 년 가까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는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은데 팔십 대 중반 노부부가 함께하는 닭집이라니. 보물찾기에서 일등이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한 것처럼 나에게는 소중한 곳이었다. 

곱게 갈린 마늘과 생강. 아침 일찍 어르신의 남편분께서 모두 마련해 주셨다. / 사진=김진경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아버님. 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김순열 어르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시의 한 글귀 한 글귀에 가득 담겨있었다. 60년이 넘는 함께한 부부의 세월 동안 중 이 보성시장에서의 시간이 50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닭집. 중앙닭집을 40년 넘게 지켜왔고 그 중앙닭집은 반백 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김순열 어르신은 사실 맛있는 통닭의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저 신선한 재료만 있다면 음식 맛은 좋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마늘과 생강, 달걀. 그리고 얼리지 않은 신선한 생닭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마침 통닭 주문이 들어와 어르신이 통닭 만드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반죽 재료를 넣고 한참을 계속 손으로 주물럭거리셨다. 손가락 마디가 아프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계속 닭을 쭈물거리고 계셔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반죽을 만지냐고 했더니 이렇게 해야 양념이 고기 안으로 잘 배어들어서 그런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신선한 재료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맛있는 통닭의 비결은 그 음식을 준비하고 만드는 어르신의 철학과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변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제주 사람들이 사랑받는 닭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르신의 일과를 여쭤보았다. 지금 사시는 곳은 삼양.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시는데 아침 5시 50분에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신단다. 6시 5분 차를 타고 보성시장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가게를 열 준비를 하고 있으면 근처 정형외과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되고 물리치료를 받고 오신 후 본격적으로 하루의 영업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저녁 시간까지 있어야 집에 들어가면서 들리는 손님들이 헛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젊은이들도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면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는 데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루틴이 삶이 되어버린 김순열 어르신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 중 하나였다.

“젊은 사람들은 통닭집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정육점처럼 우리 집도 백숙, 닭볶음탕, 닭죽, 삼계탕 하려고 닭장만 해가는 손님들도 많았어. 닭똥집 특히 좋아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닭똥집도 많이 튀겨주고.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주말만 되면 상에 올리려고 꽃닭도 그렇게 많이 주문했지. 결혼들 막 많이 할 때 즈음 되면 꽃닭에 쓸 닭 튀기느라 바빴지.”

그제야 상호가 ‘중앙통닭’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내게 가게 간판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중앙닭집’. 그러고 보니 어르신을 찾아뵐 때마다 어르신은 통닭만 튀기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손님들을 들어왔고 오시는 손님 모두 반갑게 맞이하고 계셨는데 오래된 단골손님들은 시장 통닭을 사러 오기보다는 손질된 닭을 사러 오신 분들이 많으셨다.

단골인 듯 한 손님이 중앙닭집 앞에 멈춰 서 계시면 김순열 어르신께서는 서로 주문과 관련된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그 손님이 어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닭을 장만해 가실지 거의 아시는 것 같았다. 서로 별다른 주문을 넣지 않아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닭을 손질해서 주시는 어르신과 손님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오래된 시간으로 이어진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라고 합니다. 두 분이 서로 기대며 사셨을 시간의 다정함이 느껴져 인터뷰 내내 마음이 따뜻해져왔습니다.&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라고 합니다. 두 분이 서로 기대며 사셨을 시간의 다정함이 느껴져 인터뷰 내내 마음이 따뜻해져왔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갑 써’라고 인사하는 그 짧은 인사의 억양 속에 함축된 의미는 서로의 건강과 안부였다. 내가 대형마트보다 시장을 더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매대에 놓인 물건만 사고, 파는 행위 이상의 사람들끼리 교감과 소통의 장(場). 중앙닭집, 그리고 그 옆의 장원닭집과 나주닭집이 바로 사람들의 교감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순대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이며 사람 사는 이야기가 채워지는 곳이 바로 이곳, 보성시장이었다.

“지금도 우리 하르방도 몸이 편치 않은 사람이라 센 일은 못 해. 나는 내가 남자 역할 하면서 이제껏 일하면서 살았어. 구덕포에서 물질할 때 호도(호두) 모양으로 몇 개씩 일어나는 홍합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 칠순에 조카들 서면 사니까 부산을 간 김에 나 어렸을 때 살았던 구덕포 가 보니까 우리 집 두 채 있던 그 땅에 호텔 크게 지었더라고. 암튼 그렇게 지금까지 나는 살았어. 그냥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나도, 하르방도 아프지 않고 손님들도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어렸을 때 아빠가 약주를 하고 들어오시면 늘 한 손에 들려져 있던 시장 통닭. 그 종이봉투에 들어있던 시장 통닭만큼 그립고 맛있었던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중앙닭집 김순열 어르신이 튀겨준 통닭을 손에 들고 집에 들어간 날 우리 집 아이들이 내 손에 들린 통닭 상자를 보며 소리를 지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문득 생각나 묘한 감정이 들었다. 

다음날 김순열 어르신을 또 찾아뵈었더니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고 챙겨가라며 밀크글라스 접시를 내 손에 기필코 쥐여주셨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있지만 깨끗하고 금테도 헤지지 않아 상태는 좋았던 접시. 때때로 오래된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유행지난 접시겠지만 내게로 온 이상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반짝이는 보물들이었다. 어르신의 접시를 한 아름 받아오면서 이 접시에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담아 많은 사람과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르신이 주신 밀크글라스접시. 어르신은 이제 필요없다 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사진=김진경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시즌3에서 만난 열 두 분의 어르신들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던 귀한 일 년이었습니다. 한 분 한 분 어르신이 살아온 삶의 지혜와 철학, 아무 대가 없이 알려주신 귀한 제주 음식 이야기를 부족한 필력으로 쓰자니 늘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시즌3은 김순열어르신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내년 정월멩질 즈음 시즌4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는 이로이로 김윤영이라고 합니다. 전할 소식이 있어 그림 한장을 더 그려보았습니다.

2020년5월부터 2023년 11월까지 총 74편의 그림을 격주로 연재해왔었는데요,  저는 이번 그림을 끝으로 연재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제주의 삼춘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한달에 두번씩 그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려내며 평범했던 저의 그림이 꾸준한 기록으로 인해 특별해질 수 있었습니다.

삼춘들의 이야기들은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삼춘들의 평균 연령대를 생각하면 당연한것 같아요. 하지만 인터뷰 마지막에 항상 해주시는 말들은 그래도 제법 재있었다고 힘들지 않았다였습니다. 그렇게 돌아와 그림을 그릴때면 삼춘의 앞으로의 시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건강하고 활기차게 웃고 있는 모습을 주로 그리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연재를 처음 시작할때만 해도 그림을 그리고 인터뷰하는 시간들이 녹녹치 않았지만 마감이라는 약속때문에 만 4년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삼춘들을 그리는 일이 제법 자신있게 되었습니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꾸준히 쌓여가는 기록의 힘을 믿게 되었고 성실함이라는 무기도 얻게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성실히 꾸준하게 어디선가 제주를 기록하겠습니다.  그동안 제 그림을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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